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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대법원
판사가 앉아있는 단상이 높게만 느껴졌다. 판사가 판결을 하나하나 읽어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각자 재밌는 표정을 지으며 법정을 빠져나갔다. 싸움에서 이긴 개선장군과 패잔병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깔끔한 와이셔츠와 롤렉스시계, 명품 허리띠, 향수로 무장한 대형 로펌 변호사와 어젯밤도 술로 지새운 듯한 어두운 낯빛으로 허름한 서류가방을 들고 있는 변호사 역시 극명했다. 대법관과 변호사들을 보면서 잠시 머릿속으로 법조계의 세상을 상상해봤다. 물론 막연한 공상이었다. 원고로 대기업과 대형 로펌의 이름들이 많이 들렸다. 종친회와 문중의 법정싸움도 재밌었다. “부모 제사상 앞에 싸움판이네” 분명 돈 문제 였으리라. 누가 문중땅이라도 팔아먹은 것일까.
민사재판이 끝나자 형사재판 판결이 낭독되었다.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 목구멍이 뻐근해지고 묵직해지는 느낌이었다. 자랑스러운 역사 선생님.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서 문득 삼성은 근로조건이 아주 좋아 노조가 없다고 말하던 중학교 사회선생님을 떠올렸다.
1. 돈 못 버는 농민과 돈 버는 농업인의 사이
생활정보 프로그램을 틀면 억대 매출의 농업인들이 나오고 뉴스를 틀면 수지가 안 맞아 배추밭을 그대로 갈아엎는 농민들이 나온다. 지난 1년 동안 무주에 있으면서도 나는 아직 이 두 사이의 괴리가 어디서 오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투기 작물, 중간상인, 농협, 미디어 등. 이제 고리 하나하나를 알아가고 있다. 농업 전체를 보는 안목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2. 갈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예전에는 이런 저런 사회문제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했지만 이젠 갈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너무도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대체적으로 내가 신뢰하는 몇몇 매체들을 통해 세상을 본다. 만약 매체가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정보가 나한테 주어진다면 나는 과연 판단할 수 있을까?
3. 욕심과 기술
"볼보 타다 사고 나본 사람은 절대 다른 차 안탄데. 아, 거기다 연비까지 좋아."
"차의 안전성과 연비는 보통 반비례하지 않나?" "그게 기술력이지."
사람들은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가끔 두 가지 모두를 잡고 싶을 때가 있다. 이것은 욕심일까 아니면 기술로 극복할 수 있는 무엇일까.
4.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 할 수도 있지만(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5. 그리운 곳
간디학교, 그 속에서 우리는 자본과 기타 여러 책임들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런 의존적이고 무책임한 상태이었기에 내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지 가끔 생각하기도 했다. 오늘은 비가 내렸다. 오랜만에 세상이 선명해졌고 흙냄새, 비냄새, 풀냄새가 났다. 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